[Zoom In] 유구한 역사를 지나온 길, 숙명여대 총장사(史)
FOCUS
4938
2020.07.07
http://pr.sookmyung.ac.kr/bbs/sookmyungkr/67/109124/artclView.do?layout=unknown

[Zoom In] 유구한 역사를 지나온 길, 숙명여대 총장사(史)

 

 

숙명여대가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1955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재임한 총장들을 알아보고 총장선출제도의 변화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1955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숙명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은 임숙재 당시 학장이다. 임 총장은 숙명여고보와 동경부립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가사과에 입학해 4년간 재봉을 전공했다. 1939년에는 숙명여자전문학교 개교와 함께 조교수로 임명돼 조선재봉을 담당했으며, 해방 후인 1945년부터는 최초의 한국인 교장으로 취임한 이래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숙명의 성장을 함께 했다. 1958525일자로 퇴임한 임숙재 총장은 숙명의 종합대학교 승격을 위해 사재를 기부했으며, 모친의 아호를 딴 금운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13년간 모교를 위해 많은 애정과 열의를 쏟았다. 이러한 공로로 1956년 교육공로상을 수여받았으며, 이듬해 중앙대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종합대학교 승격 기념으로 임숙재 총장과 교직원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임 총장의 퇴임 이후 1960년부터 1981년까지 약 20년 간은 군사정부와 유신체제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외부의 교육계 중진들이 숙명의 총장으로 임명됐다. 특히 이 시기에는 정부가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억제하고 정권의 안정을 꾀하고자 대학에 강력한 통제를 가하던 때다. 이에 총장과 학장의 임명을 포함한 대학의 인사권을 정부 내각의 관리감독 하에 두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제정됐다. 일례로 조교수 이상의 교직원은 총장의 제청으로 문교부 장관(현 교육부 장관)을 경유하여 내각수반이 임명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1958년 제2대 총장으로 취임한 김두헌 문학박사는 도쿄대 윤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대 교수, 진단학회 위원장, 대한교련회장, 문교부 고등교육국장 등을 역임한 당시 한국교육계의 중진이었다. 그러나 취임 1년여 만에 터진 419 혁명의 시대적 여파에 따라 자진사퇴하게 됐다. 뒤를 이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를 거친 김두종 의학박사가 제3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419의 잔영이 학원가에서 완전히 가시지 않은 긴장된 분위기에서 취임한 김두종 총장은 무엇보다도 학내의 인화 단결과 학구적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김두종 총장 역시 516 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부의 임시특례법에 따라 13개월 만에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재단법인 숙명학원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 진통을 거듭하다 1963년 한국 최초의 회계사인 김순식 경제학박사를 제4대 총장으로 선출했다.

 


<1970년대 후반 숙명여대 캠퍼스 전경>

 

격동과 혼란의 민족사를 관통하다

 

1960년대 계속되는 정치적 격동으로 대학들이 혼란을 겪은 가운데 우리대학은 학교법인 숙명학원의 대학운영을 둘러싸고 구황실 측의 이사회 운영 참여와 문교부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해 또 다른 시련을 맞이했다. 숙명학원은 해방 이후 재단이사진 구성 문제로 논란이 있었는데, 1960년대부터는 재정문제와 더불어 문교부의 관선이사 파견 등 이사진 구성에 대한 논란, 그리고 행정소송까지 겹치면서 내부의 갈등이 지속됐다. 이에 김순식 총장도 보장된 임기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1965년 사임했으며 제5대 총장에 문교부 차관을 역임한 윤태림 총장이 취임했다.

 

한동안의 격변기를 끝낸 숙명은 1970년대 들어 내부 혼란을 정리하고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윤태림 총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하자 1969년 서울대 대학원장에 재직 중이던 이인기 박사가 제6대 총장으로 취임했으며, 이어 1973년엔 고려대 정경대 교수와 성균관대 법정대학 교수를 지낸 김경수 박사가 제7대 총장에 올랐다. 유신체제의 통제가 강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저항도 거세졌던 1977년 서울대 부총장이던 서명원 박사가 제8대 총장에 발탁됐다. 그러나 뜻밖에도 취임식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충남대로 전임발령을 받고 보름여만에 사임했다. 서 총장은 학문과 봉사가 사명인 대학 사회에서 권위주의가 어떤 의미를 차지할 것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숙대신보] 1977.3.24.)는 뼈있는 이임사를 남겼다.

 

갑작스러운 총장 공석 사태에 거의 한 학기 가까이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대학은 19777월 차낙훈 박사가 제9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정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차 총장은 고려대 재직 30년 동안 학생처장과 총장 직무 대리 등을 맡았던 교육 행정가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80년까지는 전 국가적인 격동기였다.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학원의 완전 자율화 바람이 불면서 대학가가 들뜨던 시기다. 호국단이 해체되고 전국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계엄령이 발동하면서 휴교 사태를 겪기도 했다. 1981824일 열린 퇴임식에서 차낙훈 총장은 다음과 같이 감회를 밝혔다.

 

본인이 총장으로 취임했던 1977년 이후 오늘까지 우리는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국가적으로 커다란 변혁이 있었고, 그 변화와 새로운 질서의 모색과정에서 또한 많은 진통을 대학은 겪어야 했습니다. 때로 그 진통은 학생 여러분이나 교수 여러분에게 매서운 시련으로 다가오기도 했으며, 본인으로서도 참기 힘든 아픔으로서 견디기 어려웠던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과 더불어 이제 그 시련은 극복되었고 더욱 밝아오는 새 사회와 함께 우리 대학도 더욱 밝은 발전의 전망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숙대신보] 1981. 9. 10.

 

<숙명여대 역대 총장 소개_1955 ~ 2020>


 

최초의 동문 총장이 선출되다

 

198178일자로 제9대 차낙훈 총장의 임기가 만료된 후 우리대학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동안 외부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총장으로 임명하던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내부의 역량 있는 인사를 발탁할 시기가 됐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당시 많은 숙명인들은 숙명의 개성과 연구풍토를 위해 외부 인사보다는 숙명의 교육 이념과 정신을 생활화하고 있으며, 학내 사정을 잘 아는 인사가 총장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장기적인 숙명 발전을 위해서는 내부 의사를 반영하여 총장이 선출되어야 한다는 동문회의 입장과 호국단, 학과 학생회장, 서클 대표 같은 학생 자치 단체의 건의가 이사회에 공식 전달됐다. 이러한 학내외의 관심과 기대 속에 드디어 1981814일 이사회에서 제10대 총장으로 정치외교학과 김옥렬 교수를 선출했다.

김옥렬 총장은 1949년 영문과에 입학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 국제정치학, 브라운대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브린마워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장, 정경대 학장 등을 두루 역임하고 1979년에는 제10대 국회의원으로 의정에 참여했으며, 1981년 교수로 복귀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었다.

동문 총장의 등장은 숙명인의 오랜 열망을 해소시켜 준 역사적 사건이다. 태완선 이사장은 김옥렬 총장의 취임식에서 김 총장의 선임은 초대 임숙재 총장 이후 처음으로 학내에서 총장이 선출되어 숙명의 새로운 전통을 세우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평했다.

한국의 숙대에서 세계 속의 숙대로 발전시키는 것을 숙명의 당면과제로 천명한 김옥렬 총장은 1985년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연임에 성공하며 8년의 임기동안 교지 확장, 기구 확충, 우수 교원의 확보, 학생 수의 증가, 장학금 확충, 자매결연 체결 등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대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전체교수회의에서 투표권을 가진 교수들의 자유투표를 통해 총장 후보자를 직접 정하는 이른바 콘클라베방식의 총장 선출제도가 정립된 것은 제12대 정규선 총장부터다. 1989학년도 학원 민주화 투쟁의 가장 큰 쟁점으로 총장 선출 문제가 부각됐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대학 교수학생회노조 측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담아낼 수 있는 총장을 선출하고자 팽팽하게 대립했다. 교수 측은 총장 선출 과정에 학생과 직원이 직접 투표 형식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총학생회는 구체적인 후보를 내세우기보다 여대라는 특수성을 인식한 민주적인 교수 선출을 주장했으며, 직원 노조는 직접투표권을 강하게 요구했다. 구성원들의 의견 충돌로 인해 총장 선출은 해를 넘기게 됐는데 결국 이듬해 2월 열린 전체교수회의에서 김상순 교수와 정규선 교수가 최종 후보로 선출됐고, 이사회는 정규선 교수를 제12대 총장에 선임했다. 구성원의 직접 선출로 뽑힌 첫 총장인 정규선 총장은 1958년 약학과에 입학한 후 1970년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후학양성에 힘썼다. 1978년 우리대학 약학 박사학위를 받고 학장 및 주요 보직을 역임하며 학교 행정 경험을 쌓았다. 대한약학회 평의원, 보건사회부 중앙 약사심의회 위원, 한국균학회 회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2006년 창학 100주년 기념식>

 

2의 창학과 새로운 변화의 조짐

 

1994년 이경숙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제13대 총장에 올랐다.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캔자스대 정치학 석사, 사우스캐롤라이나대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 총장은 20년간 모교에 봉직하며 학교 사정에 정통하고 인격과 학식을 고루 갖춰 구성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취임 후 ‘21세기를 향한 국제사회의 여성지도자 육성이라는 기치 아래 제2창학운동이라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주요 사업으로 2창학캠퍼스 조성을 포함한 교육시설 확충 외국대학과의 교류를 통한 국제화 역량 강화 대학 종합전산망 구축사업 시행 사회기여 및 봉사기능 강화 통일에 대비한 민족화 정책 추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총장은 1994년을 시작으로 2008년까지 숙명여대 역사상 최초로 4연임을 하며 최장수 총장 기록을 남겼다. 특히 직선제로 선출된 총장이 4연임을 한 것은 국내 대학에서 유래가 없다.

 

2008년 제17대 총장으로 한영실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선출됐다. 한영실 총장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부경대 식품생명과학과 교수를 거쳐 1997년부터 모교에서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음식연구원장, 산학협력단장, 사무처장, 교무처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쳐 이경숙 전 총장의 뒤를 이을 적임자라는 평을 받았다. 한 총장은 재임 시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여성교육과 지위향상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인 AAWC를 개최하고, 세계 명문대학 교수와 지역인재를 초청해 세계를 배우는 국제여름학교와 국제겨울학교를 시작하는 등 국제교류의 폭과 다양성을 크게 확장했다. 여대 최초의 ROTC를 창단해 주목을 받았으며, 창업보육센터 건설, 숙명역사관 건립 등 교육공간 확장에도 주력했다. 이에 QS 아시아대학평가 아시아 종합 24(의대없는 학생 12천명 이하 대학 기준), 중앙일보 대학평가 10위권 진입 등의 교육성과를 거뒀다.

 

2012년 숙명여대 제18대 총장으로 황선혜 영어영문학부 교수가 취임했다. 황선혜 총장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쉬펜스버그 주립대에서 영문학 석사, 펜실베니아대에서 교육언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모교에서는 영어영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처장, 특수대학원장, 문과대학장을 역임했다. 2012년 당시 학교법인과 대학본부가 학교 운영 등의 문제로 분규를 빚으며 장기간 학내갈등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새롭게 분위기를 쇄신하고 구성원들의 화합을 이끌어 낼 총장으로 기대를 모았다. 취임 직후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현장형총장이 되겠다는 약속을 내걸은 황 총장은 글로벌 여성교육의 허브로서 사회수요에 맞는 여성인재를 배출한다는 목표로 공과대학을 신설했다. 취업과 함께 창업역량 강화에도 집중해 창업 관련 정부 및 민간 사업 유치에 성과를 거뒀다. 2016년엔 산업연계교육활성화선도대학사업(프라임사업) 수주에도 성공했다.

 


<2019년 숙명여대 캠퍼스 전경>

 

숙명여대가 창학 110주년을 맞이한 2016년에는 총장선출을 앞두고 일부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그동안의 총장선거에서는 별도의 총장 후보 등록 절차나 정책발표회가 없이 전체교수회의에서 최다 득표를 한 후보자를 1, 2순위 총장 후보자로 선정해왔었다. 그러나 선거 당일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구조여서 후보자들의 공약을 구성원들이 충분히 듣기 어렵다는 단점이 꾸준히 제기됐었다. 이에 일부 후보자의 경우 미리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두 차례 개최한 공약 발표회에서 자신의 소견을 알리는 기회도 가졌다. 그리하여 투표를 거친 끝에 강정애 경영학부 교수가 제19대 총장으로 선출됐다.

 

강 총장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파리1대학에서 인적자원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사관리학회장과 대통령 소속 국민경제자문회의,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인사혁신처 자체평가위원회 위원장, 한국경영학회 부회장 등을 지낸 인사관리 전문가다. 모교 취업경력개발원장으로 재직할 시 만든 멘토링프로그램으로 대학가의 표준모델을 만든 바 있다. 강 총장은 취임사에서 숙명여대의 창학이념인 국가와 민족,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여성지도자 배출을 위해 교육학생교수의 질을 최고 수준으로 구현하는 르네상스 숙명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미래의 가치를 품은 글로벌 숙명이라는 비전을 선포했다.

 

 

숙명여대는 강 총장 재임 시기 서울시와 용산구 등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강조하며 캠퍼스타운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2주기 대학구조개혁평가와 제1캠퍼스 변상금부과처분취소 소송에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프라임사업의 일환으로 제2창학캠퍼스에 최첨단 강의동인 프라임관을 건설했으며, 교내 인프라 고도화에 나섰다. 청년 취업난이 가중되는 가운데 여대 취업률 1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기술이전을 포함한 산학협력의 질적인 성장을 도모한 것도 또 다른 성과로 평가된다.

 

 

관련기사:

[Focus] 창학 114주년에 처음으로 실시되는 숙명여대 첫 총장직선제를 말하다

[People] 숙명여대 최초의 총장직선제 중심에 선 이들을 만나다!

[Focus]
창학 114주년에 처음으로 실시되는
숙명여대 첫 총장직선제를 말하다

[People]
숙명여대 최초의
총장직선제 중심에 선 이들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