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철학 함께 담는 풍자만화가 좋아요” 도쿄공예대 정인경 교수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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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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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한편에 실리는 풍자만화는 그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통렬하게 꼬집는 민중의 예술이다. 이제는 비판적인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여럿 생겼지만, 풍자만화의 역할과 사명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런 풍자만화를 20여 년간 직접 연구하고 그려온 ‘만화 박사’가 있다. 바로 만화가이자 도쿄 공예대학교(東京工藝大學) 만화학과 교수인 정인경 동문(사학과 92)이다.



 

1. 우리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는데, 만화를 연구하고 그리는 데 어떤 도움이 됐나요?

 

만화가의 꿈은 어렸을 때부터 있었지만, 그림만 그린다고 해서 만화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기본적인 교양으로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숙대 학부를 졸업한 직후 일본 유학을 떠났는데, 이때 정립된 가치관과 역사 지식이 고독한 유학 생활을 지탱하는 정신적인 힘이 됐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풍자만화를 제작하는 데도 어설픈 지식으로 펜을 휘두르는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당시에는 만화연구가 매우 드문 일이라고 들었는데, 풍자만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엔 순정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도쿄의 일본어학교에서 유학하면서 목표가 바뀌었어요. 1996년 당시에는 아직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지 않은 시기여서 일본 만화의 전모를 몰랐는데, 현지에 와서 보니 일본에는 정말 다양한 만화가들이 활동하고 있더라고요. 점점 ‘내가 꼭 순정 만화를 그려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중에 나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고, 1997년 교토 세이카대학교(京都精華大學) 만화 분야(당시) 학부 1학년으로 입학했습니다. 당시로선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일한 풍자만화 고등교육기관인 이곳에서는 1973년부터 일찍이 카툰(풍자만화)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신문과 시사잡지를 읽어 왔고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풍자만화가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3. 지금까지 주로 어떤 분야를 연구했는지 소개해주세요.

 

학부 때부터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줄곧 풍자만화를 제작하고 연구했습니다. 박사논문의 테마는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서 45년간 연재한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과 작가 김성환 화백이었습니다.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어떻게 시사풍자만화가 한국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장기간 연재될 수 있었는지와 더불어, 민주화 과정에서 고바우 영감의 역할 등을 김성환 화백의 개인사와 연계해 분석한 논문입니다.

 

김성환 화백과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완성한 박사 논문과 작품은 책으로 발간됐고, 2007년 제50회 일본 저널리스트 회의상(日本ジャーナリスト会議賞)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4. 만화를 연구하는 동시에 만화작가로도 활동했는데요, 동문님이 그린 만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제6회 교토국제만화전(2004)에서 그랑프리(최고상)를 수상한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교토국제만화전은 전 세계 프로 카투니스트들이 매회 환경문제에 관한 테마로 풍자만화를 제작해 응모하는 만화전이에요. 당시 테마는 <재밌고 웃기는 에너지>였습니다. 9.11 테러(2001), 아프가니스탄 침공(2001), 이라크 전쟁(2003) 등을 보도로 접하고 ‘왜 인류는 위대한 예술에서 배우지 않는가?’라는 의문에서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저는 전쟁의 참상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고 놀라서 군복을 벗는 젊은 병사를 제작했습니다. 물질적인 에너지가 아닌 평화의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작품 속에 녹여낸 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제6회 교토국제만화전 수상작


5. 오랜 시간 동안 한 가지 분야를 사랑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는 것은 굉장한 노력과 품이 드는 일 같아요. 계속 만화를 곁에 두고 연구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만화에 대한 사랑이 저에게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웃음을 주며 철학적인 의미도 담아낼 수 있는 풍자만화가 좋습니다. 또한, 현재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만 저 스스로에게는 ‘작가’라는 자각이 조금 더 강합니다. 작가라면 누구나 있을, 지금보다 더 잘 그릴 수 있고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6. 2008년 인터뷰에서 만화를 산업으로 보기보다 예술로 대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오랫동안 만화와 함께한 동문님이 가장 바라는 형태의 만화는 어떤 모습인가요?

 

정치적 신조가 달라도 웃으며 공감할 수 있는 만화야말로 진정한 풍자만화라고 생각해요. 풍자만화는 예술과 저널리즘이 융합된 독특한 장르이고 풍자만화가에겐 화가의 기량, 저널리스트의 시점, 코미디언과도 같은 유머 감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특히 고바우 영감의 연재 종료 이후로 이 모든 요소를 균형 있게 갖춘 한국의 풍자만화는 드물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의견을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통해 표현할 수 있게 사회가 변화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죠. 사람들 사이의 정치적인 분단이 심화되고, 일각에서는 풍자적인 표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풍조가 등장하면서 정작 진정한 풍자는 실종된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7. 만화를 사랑하고, 이 분야로 나아가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 안에 존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만화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가 마찬가지겠지요. 표현하고자 하는 확고한 무언가가 이미 존재한다면 표현을 위한 토대를 닦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 결과적으로 지름길일 수도 있다는 말도 전하고 싶습니다.

 

취재: 숙명통신원 21기 김수민(한국어문학부 22), 정서영(행정학과 21)

정리: 커뮤니케이션팀